‘불의에 저항한 역사’ 리틀락 센트럴 고등학교에 ‘태극기’ 상설계양

알칸사 한인상공회의소 노력의 성과 ... "불의에 맞선 상징의 만남"

 

사진/ 알칸사주 리틀락 센트럴 고등학교에 상설 계양된 태극기 

알칸사주 리틀락 센트럴 고등학교에 태극기가 상설 계양된다. 알칸사 한인상공회의소(회장 이창헌)에 따르면 리틀락 소재 센트럴 고등학교 내부에 태극기가 계양됐으며 이는 알칸사 주에서 처음이다.

이창헌 회장은 “하남시에서  센트럴 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당시 학교내에 다른 국가의 국기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난 후 한국의 태극기도 계양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하남시로부터 태극기를 제공받아 센트럴 고등학교에 설치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인종차별에 대항한 미국의 대표적인 시민운동의 성지인 센트럴 고등학교에 한국의 태극기가 계양된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침탈한 일본에 저항하며 3.1운동으로 대표되는 한국형 시민운동 중심에 태극기가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태극기는 단순한 ‘국기’의 차원을 넘는다. 불의에 저항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과 우리민족의 ‘한’이 담겼다.

따라서 미국의 교육현장에서조차 흑인들은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불의의 상황에 맞섰던 세트럴 고등학교에 세워진 태극기가 ‘불의에 맞선 상징’의 만남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 시민운동의 역사 ‘센트럴 고등학교’ 리틀락 사건

리틀락 센트럴 고등학교는 미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미국 인종차별의 대표적 사건인 리틀락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 흑인학생들의 등교를 거부하자 시민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장소다.

리틀락 나인(The Little Rock Nine)이라 불리는 9명의 흑인 십대들은 리틀락 센트럴 고등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흑인이었다. 1954년 미국 대법원이 흑인과 백인이 분리된 학교는 불법이라는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은 인종파별의 종식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흑인학생들의 백인학교 입학허용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후 리틀락 교육위원회는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학교의 인종차별을 자발적으로 철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절정에 달했던 남부지역 백인들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9명의 흑인 청소년들이 학교 등교를 앞둔 전날인 1957년 9월 2일 알칸사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동원에 학교 입구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9명의 학생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9명의 학생들의 등교를 막기위한 주지사의 결정이었다.

연방판사가 등교명령을 내렸지만 주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6일이 지난 후 연방 판사가 주방위군 철수와 함께 리틀 나인(9명의 흑인학생)은 학교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백인 학생들과 군중들은 격렬하게 항의했고 결국 학교관계자들은 학생들을 집에 돌려보내야 했다.

인종갈등이 격화되자 1957년 9월 25일 리틀락의 우드로 만 시장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게 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군대를 파견했고 리틀나인 학생들은 육군 101 공수부대의 보호를 받으로 정규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인종차별은 등교후에도 이어졌다. 백인학생들로부터 괴롭힘과 조롱, 위협을 받았지만 1958년 5월 27일 어니스트 그린이 학교역사상 최초로 센트럴 고등학교를 졸업한 흑인이 됐다.

센트럴고등학교의 흑인학생 등교반대로 시작된 흑인사회의 시민운동은 알칸사주 전체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면서 1998년 알칸사 주지사 출신이었던 클린턴 대통령은 리틀록 중앙 고등학교(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를 미국의 역사적 장소인 ‘국립사적지’로 지정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사진/ 알칸사 한인상공회의소 이창헌회장(왼쪽)과 리틀락 센트럴 고등학교 Nancy Rousseau 교장 

 

안미향 기자 amiangs0210@gmail.com

Exit mobile version